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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기로에 서 있다. 우리 자손들이 장차 유치원 시기부터 서로를 경쟁자로만 인식해 ‘무한 경쟁’에 몰입할 것인지 아니면 서로를 배려해주고 도와주는 정상적인 사람으로 살 것인지는 지금 우리들의 행동에 달려 있다. 오른쪽으로 치우쳐도 너무 치우친 우리 상황에서는, 비시장적 사회와 같은 궁극적인 이상은 고사하고 일반대중들이 어느 정도 받아들일 만한 복지 자본주의만이라도 성취하려면 왼쪽으로, 더 왼쪽으로 계속 나아가야 한다. 그리고 지배계층에게는 왼쪽으로부터의, 밑으로부터의 압력을 계속 넣어야 한다. 지금 우리 상황에서 ‘앞으로 나아간다’는 것과 ‘왼쪽으로 나아간다’는 것은 크게 봐서 동의어이다. 
(이 책, 15쪽, <프롤로그>에서)


또, 박노자입니다. 제가 박노자를 좋아하긴 하나 봅니다. 그의 책을 거의 다 구입해서 아껴가며 한권한권 읽어내고 있으니까요. '좋아함'은 그의 관점과 분석에 대한 동의에서 나오며, 그의 책을 읽는 것은 기본적으로 제 자신의 확인과 강화이고 때로는 제 생각에 있어서 외연의 확장입니다. 제가 미처 생각지 못한 문제를 그의 관점으로 분석하고 해석할 때 제 사고의 영역은 확장됩니다. '아껴가며 읽음'은 다 읽고 나면 더 읽을 그의 책이 없음에 허전해할 것 같아서 그렇습니다. 맛있는 음식을 한번에 먹지 않고 천천히 먹는 심정과 비슷하다면 말이 될까요.
 
박노자, 왼쪽으로 더 왼쪽으로:당신들의 대한민국 세번째 이야기, 한겨레출판, 2009.   * 총 321쪽.

2010년 2월 26일(금)부터 3월 4일(목)까지 읽었습니다. 지하철에서만 읽지 않고 집에서도 좀 읽었는데 일주일에 걸쳐 읽은 것은, (춘곤증의 여파였는지) 지하철에서 졸음이 엄습해서였던 것 같습니다. 늘 그렇듯 책의 내용이 어렵진 않았는데 독서의 속도가 잘 나지 않았습니다. 봄 탓, 몸 탓을 하렵니다. ^^;

다음은, 앞서 포스팅한 박노자의 책 리뷰입니다.
「당신들의 대한민국 01」 →
http://befreepark.tistory.com/1258
「당신들의 대한민국 02」 → http://befreepark.tistory.com/1278
「박노자의 만감일기」     → http://befreepark.tistory.com/1248

 

 
왼쪽으로, 더 왼쪽으로 - 10점
  박노자 지음 / 한겨레출판

* 출판사의 책소개를 보시려면 제목이나  표지를 클릭하세요.
 
 
 
        박노자, 왼쪽으로 더 왼쪽으로. '왼쪽'에서 바라본 개혁, 민주주의, 탈민족.

 

( 박노자의 「당신들의 대한민국」 세번째 이야기, 「왼쪽으로 더 왼쪽으로」.
제목처럼, 박노자는 한국사회를 '왼쪽에서' 들여다 본다. '왼쪽'은 언제나 '근본적'이다. )



 

1. 이 책은?

이 책은 박노자의 「당신들의 대한민국」 1권과 2권의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책을 읽는 독자에게 내용과 형식에서 무리없이 연속물로 읽히며 책의 부제도 그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이 책에서 박노자는 한국사회를 특유의 객관적이고 근본적인 관점에서 바라봅니다. 현안이 된 사건과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음에도) 현안이 되지 못한 사건을 들여다 봅니다. 객관적이고 근본적인 해석이 되기 위해 외국의 사례를 살피기도 합니다.

박노자 고유의 매력이 앞선 1권과 2권에 비해 한층 더해진 것 3권 같습니다. 제목으로 말하는 바와 같이 '더 왼쪽'의 시각을 견지합니다. 그의 말대로 '더 왼쪽'은 '더 전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동시에 '더 왼쪽'은 '더 근본적인 관점을 유지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2. '개혁'을, 왼쪽에서 더 왼쪽에서 보자!
 
'개혁' 담론이라는 게 한국에서는 더 이상 의미가 없다. 물론, 제2, 제3의 노무현이 집권을 할 수야 있지만, 그 실적은 제1대 노무현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자유주의자들이 그 무슨 '개혁'을 들먹여도 '한국적 체제'─군사안보 국가, 부동산 과열, 토건 집중, 관료들에 대한 대자본의 지배, '명문대' 학벌 우대, '현대판 천민(비정규직)' 과중 착취 등등─를 유지하는 방향으로 갈 것이다.
(55쪽, <자유주의적 온건 개혁의 미망>에서)
 
서울대 교수 조국의 말대로 개혁-진보 진영의 집권은 반드시 필요하고 진보집권을 이뤄내기 위해서 집권 후 플랜(개혁 청사진)을 좀더 정교하고 세밀하게 그리고 현실적으로 그려야 합니다. 그리고 현재 대한민국에서 수구-보수 진영의 집권에 비해 개혁-진보 진영의 집권이 만들어낼 사회상은 상당히 다를 거라 확신합니다. '진보집권'이 이뤄져야 하는 이유입니다.

하지만 박노자의 말대로 그것은 동시에 한계를 지닐 수 밖에 없습니다. 절차적 민주주의를 복원하는 것과 복지예산을 조금 더 늘리는 것 이상의, '지배 시스템'을 손보는 일을 해낼지는 솔직히 의문이니까요. 정치적 무관심을 담아내는 '그 놈이 그 놈'이라는 말에는 백번 반대하지만, '왼쪽의 관점'에서 볼 때 '어차피 거기까지야'라는 말에는 천번 수긍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아래와 같은 박노자의 지적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김대중과 노무현의 자유주의적 정권은 '개혁'에 대한 그들의 약속을 지키고자 했다면 이 체제를 과감히 뜯어고침으로써 사회적 발전의 가능성을 열어주었어야 했다. 부자 과세를 유럽 수준으로 늘려야 했고, 부동산 투기를 전면적으로 근절해야 했고, 공공 지출을 크게 늘려 취약 계층과 중산층의 구매력을 증진시켜야 했으며, 궁극적으로 수출 의존율을 적어도 유럽의 산업 국가들 수준으로 끌어내려야 했다.
(이 책, 15쪽, <프롤로그>에서)
 
 
 
 
3. '그들'만의 민주주의! '그들'만의 법치!
 
저들이 이야기하는 '민주주의'는 왜 새빨간 거짓말인가? 정상적인 부르주아 민주국가는 그 성격상 법치국가다. 현실적으로는 아무리 자본계급의 이익을 우선시한다 해도 적어도 '법'이라는 공공영역의 경계선을 넘은 자본을 혼내줄 의무가 있는 것이고, '법'이 허용하는 피착취자의 권익을 가시적으로 보호해줄 의무가 있는 것이다. '뒤에서는 아무리 '자본'과 '국가'가 동심일체가 돼도, 노동자의 요구가 일단 '법'의 잣대에 어긋나지 않는다면 그 요구를 억지로라도 들어주어야 하는 것이 민주 법치국가가 아닌가?
(129쪽, <KTX 여승무원, 그리고 허울 좋은 '민주화'>에서)
 
노동자의 요구가 절차와 내용에서 법의 테두리 내에 있다면 그 요구를 들어주는 시늉이라도 하거나 억지로라도 들어주는 것이 '법치'이고 '민주주의'일 겁니다. 하지만 그것이 '노동자'의 것인 한, 자신들의 털끝이라도 건드리는 것인 한, '법치'와 '민주주의'는 헌신짝이 됩니다. KTX 여승무원들의 투쟁에서 박노자는 '그들'만의 민주주의를 봅니다. 고상하게 말하면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한계를 드러내는 것이고 달리 표현하면 '껍데기 민주주의'일 뿐인 것이죠. 박노자의 지적을 빌어 의문이 고개를 듭니다. 과연 대한민국에서 법치와 민주주의는 언제라도 한번 자본을 혼내준 적이 있었던가. 언제라도 한번 곤봉과 군홧발을 노동자가 아닌 다른 대상에게 퍼부은 적이 있었던가. 
 
 

 
4. 진보적 탈민족이란?
 
지금은 우리가 베트남, 중국, 인도 노동자들과 손을 잡고 삼성의 주인들을 상대로 투쟁할 시대지, 이건희 전 회장과 같은 부류를 '같은 민족'이라고 해서 좋게 봐줄 시대는 아니다. 즉 진보적 의미의 '탈민족'이 요청되는 시기인 것이다. ... 보수적 의미의 '탈민족'은 '민족'의 다양한 역사적 맥락 등을 일부 무시함으로써 결국 지배자들의 논리를 합리화하는 도구가 될 위험성이 있다...
(224쪽, <탈민족 담론의 문제점>에서)
 
민족 해방이 중요한 과제인 시기에 '민족'은 진보의 전유물입니다. 식민지배에 동참(?)하여 개인적인 부와 영광을 누리는 매국 세력의 반대편에서 탄압과 피해를 감수하고 민족의 해방을 위해 싸우는 애국 운동 세력은 진보라 불러 마땅합니다.

자본이 다국적-초국적 지위를 누리면서 국가의 경계를 넘어 맹활약(?)하는 시대에 '민족'을 내세우고 '애국'이라는 미명하에 자국의 기업을 챙겨주자(?)는 주장은 본질적으로 '친자본'적입니다. 박노자의 말처럼, 외국 노동자들과 연대하는 진보적 '탈민족'이 요청되는 시점입니다.

 
 

 
5. 이런 '대학'에서 학문이 가능하겠는가!
 
'어용 교수'와 총장실 바로 옆방에서 진을 치고 버티는 안기부 요원들의 시대가 가고, 1년에 4천 5백만 원의 등록금을 내는 고려대 '글로벌 금융 경영전문대학원' 학생들이 삼성관과 LG-포스코관에서 영어로 수업을 받는 시대가 왔다. 국가의 적극적인 방조 아래 사립대학은 삼성 같은 '아비 재벌'들과 유착 관계에 있는 '새끼 재벌'로 변신했다. ... '노는 땅'을 상가 짓는 건설업체에 임대해 떼돈을 벌고, 주식투자에 적극 뛰어들고, 재벌의 기부 유치에 목숨을 걸고, 학벌주의적 사회구조에 힘을 얻고, 임용이나 승진 심사와 연구비 지원 등의 메커니즘을 동원하여 교수들을 원자화해 분리-통제하는 사립학교에서 비판적이고 창조적인 학문이 가능하겠는가? 사회에 대한 쓴 소리와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이 쉽게 나오겠는가?
(269-270쪽, <신자유주의 한국, 대학이라는 이름의 폐허>에서)
 
정치권력보다 더 영구적인 위세를 떨치는 경제권력, 대기업 재벌에 대학은 적극 유착합니다. 대학은 이제 권력의 시녀가 아니라 자본의 시녀가 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대학은 상위 재벌이 되고 싶은 하위 재벌의 모습을 노정하기도 하고, 때론 어느 대학처럼 상위 재벌의 일부가 되기도 합니다. 기업-재벌-자본에 통제되거나 그 영향력 하에 놓인 사립대학에서 과연 학문다운 학문이 가능할까요. 친기업, 친자본의 다른 이름인 신자유주의에 대한 날선 비판이 과연 가능할까요. 대한민국의 대학은 여러 층위에서 점점 더 암울해져만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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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0327 일 18:00 ... 18:50 인용,서두
2011 0328 월 16:20 ... 17:20  비프리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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