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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 전날 H여고 L양이 말합니다. (저는 입시학원 영어 선생입니다.) "공부하면서 모르는 것들 질문할께요." 이 학교 직전대비 분위기는 그런 쪽으로 흘러 갑니다. "그래, 그게 좋겠지? 다시 훑어보면서 모르는 거 질문해. 강의실에 있을게." 그리곤 그 친구에게 슬쩍 질문을 던집니다. "근데 시험 전날 시험범위에서 중요한 거 다시 짚어달라고 하는 아이들은 뭘까?" 이 친구, L양의 대답이 걸작이었습니다. "아마 개네들은 심리적 안정을 취하고 싶은 게 아닐까요?" 심리적 안정, 이 말은, 학원 선생들이 직전대비 때 느끼는 바를 요약한 바로 그 말이거든요. 해줘 봐야 성적이 잘 나올 확률은 거의 없지만 (해달라니까) 너희들의 '심리적 안정'을 위해서 해준다! 학원에서 학교시험대비는 두 단계로 합니다. 영어과목만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내신대비를 할 때 먼저 교재를 훑어줍니다. 고1, 2, 3으로 올라올수록 정규 교과서의 비율과 비중은 줄어듭니다. ebs 교재를 비롯해서 온갖 시중 문제집들, 심지어는 그달에 본 전국모의고사 문제가 교재(시험범위)로 채택됩니다. 어쨌든 시험범위에 해당하는 교재들에서 중요한 부분들, 시험에 날 가능성이 있는 사항들, (싸이코스러운 출제자가 아니라면! ^^) 문제로 반드시 나올 필수 항목들을 짚어줍니다. 그렇게 학교별로 수업을 해주면 선생인 저는 일단 한숨 돌립니다. 사실상 준비는 끝난 셈이니까요. 이게 대략 두 주 정도 걸립니다. 수업을 따로 해주어야 하는 학교의 수가 적으면 열서너 개, 많으면 스물두어 개입니다. 그 다음은 시험 전날입니다. 직전 대비 또는 직전 보충(직보)이라고 불리는 수업이 깔립니다. 사실, 시험 전날이라고 선생이 특별히 해줄 일은 별로 없습니다. 선생은 내일이 시험인 학생이 열심히 공부하는 중에 생기는 질문을 받아주는 정도입니다. 공부를 전혀 하지 않은 게 아니라면, 제가 짚어 주었던 것과 학교에서 중요하다고 했던 것 위주로 공부를 죽 해왔을 테고, 시험 전날 그걸 다시 한번 보는 형태의 공부를 하고 있어야 맞는 것이죠. 문제는(!) 시험 전날임에도, "다 해 주세요"라든가 "하나도 모르겠어요"라는 학생들입니다. 그간 함께 공부한 내용을 자신들이 보고 외우고 공부하면 되는 건데 그런 걸 전혀 하지 않았다는 이야기지요. 이 친구들이 바라는 대로라면, 두 주 넘게 수업해 주었던 내용을 시험 전날 다시 해주어야 하는데, 이건 시간적으로나 시스템적으로 불가능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최소 두 주 전부터 수업을 한 것이죠(시간). 그리고 선생에게는 다른 학교의 직전대비 수업도 있지 말입니다(시스템). 많을 땐 같은 날 대여섯 학교! 이제 그냥 본인들이 다시 훑어보고 외우면 되는 것인데, 그걸 선생이 다시 떠들어 주길 바라는 겁니다. 재미 있는 것은, 어떤 형태로든 그간의 수업 내용 중에서 진짜 중요한(?) 것들만 70~80분 동안 다시 짚어주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두 주 이상 수업한 내용을 한 시간 남짓 동안 짚어준다는 건 양적-질적 밀도를 엄청 낮춤을 의미합니다(이때 제 마음 속에는 '심리적 안정'이라는 말이 떠오릅니다!). 더 재미 있는 것은, 이 친구들의 경우 그렇게 직전대비 수업을 들은 후 본인들이 공부하는 건 거의 (또는 전혀!) 없이 다음날 시험을 본다는 것이죠. 당연히(!), 좋은 점수가 나올 수 없습니다. 뭘 가르치고 뭘 배웠든, 자기가 공부를 하지 않고 성적이 나올 순 없는 것이죠. 그래서, 가르친 사람으로서 질문을 던지게 되는 겁니다. 나는 왜 전날 그 수업을 했던 걸까? 아마도 그건, 그간 공부를 하지 않아서 막막한 심정의 학생들에게 심리적 안정을 주기 위해서는 아니었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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