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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사는 판결로 말하고, 운동 선수는 경기와 성적으로 말하고, ... 선생은 강의로 말하듯이 ^^
소설가는 소설로 말하는 것이겠지요. 하루키도 거기서 예외는 아닐 거구요.


온갖 암시와 상징과 복선과 기호가 끊임없이 등장하는 그의 소설,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에서, 하루키는 등장인물의 대사를 빌어
삶과 사랑과 섹스와 세상과 회사와 꿈과 절망과 인간과 유토피아와 ...
모든 것에 대한 '수다'를 풀어 냅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이야기하는 '수다'라고 하기엔 무거울 때도 적지 않지만,
읽는 내내 제 머리 속에는 하루키가 지금 그런 '수다'를 펼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나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하루키 정도의 무게가 실린 대화라면 아무리 많아도 괜찮습니다. ^^
그의 '수다'는, 저에게는 '공감으로 읽기' 또는 '공감하며 읽기'여서 좋습니다.
그래서 제가 하루키를 좋아하는 것이겠지요.


앞서 올린 글에서는 이 소설의 '구성'에 관해 적었고요. (http://befreepark.tistory.com/496)
이번 포스트에서는, 하루키의 '삶과 세상에 관한 수다'를 들여다 봅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삶과 세상에 관한 수다'


하루키의 '삶과 세상에 관한 수다'를 맘껏 읽을 수 있었던, 얇지 않은 두권짜리,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문학사상사) 1권과 2권.
그리고 몇 권의, 서평이 밀려있는, 다 읽은 책들... ^^a


 

 
1. 인간, 자신, 삶, 산다는 것

"인간은 누구든지 뭔가 하나쯤은 일류가 될 수 있는 소질을 갖고 있어요. 그것을 끌어내지 못하고 있는 것뿐이죠. 끌어낼 줄도 모르는 사람들이 모조리 덤벼들어서 그 싹을 짓밟아 버리니까. 그 많은 사람들이 일류가 될 수 없는 거예요. ... "
(1권 288쪽)

인간이 극한 상황에 몰리면, 흔히 육체적인 능력은 신장되게 마련이지만, 정신력은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한정되는 것 같다. 즉, 어떠한 위기 상황이라 할지라도, 같은 상황이 끝없이 계속되면 그에 대한 집중력이 필연적으로 저하되는 것이다. ... "
(2권 79쪽)

"혼나는 것은 좋은 일이지. 사람은 혼이 나면 신중해지고 신중해지면 다치지 않게 되네. 훌륭한 나무꾼은 몸에 단 하나의 상처만 지니고 있어. ... "
(2권 99쪽)

그것을 절망이라 불러야 하는 것일까?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래, 절망인지도 몰라. 투르게네프라면 환멸이라 부를지도 모르고, 도스토예프스키라면 지옥이라 부를지도 모른다. 서머셋 몸이라면 현실이라 부를지도 모른다. 그러나 누가 그 어떤 이름으로 부르든, 그것은 결국 나 자신인 것이다.
(2권 252쪽)

책 속의 여기저기서 가져온 하루키의 이야기들이지만, 어찌 제 생각과 이리도 비슷한지...
정말 깜짝깜짝 놀랄만큼 반가운 공감 대사들이었습니다.
어찌 보면 첫번째 인용한 것은, 우리의 교육현실에 갖다 붙여도^^
전혀 손색이 없을 정도였으니까요.

 
 

 
2. 죽음, 죽는다는 것

나는 죽는 일 그 자체는 그다지 두려워하지 않는다. 윌리엄 셰익스피어가 말한 것처럼, 올해 죽는다면 내년엔 더 이상 죽지 않을 것이기 분명하기 때문이다.
(1권 77쪽)

" ... 죽지 않고 영원히 산다는 불사신도 내겐 필요 없습니다. 나이를 먹는 건 괴로운 일이긴 하지만, 나만 나이를 먹는 건 아니고 모두들 하나같이 나이를 먹는 겁니다. ... "
(2권 141쪽)

너무 멋진 말을 이렇게 하루키가 다 해버리니,
저 같은 사람은 할 말이 없어지는 거 아닐까요. (좀 오바죠? ^^)
"올해 죽는다면 내년엔 죽지 않을 것"이란 이야기나,
"나만 나이를 먹는 건 아니고 모두들 하나같이 나이를 먹는 것"이란 말이나,
멋진 것으로 치자면 대략 순위권을 다툴 듯. ^^


 
 

3. 사랑, 섹스, 음악

"당신은 참 좋은 분이군요." ...
"그렇게 생각해주는 사람은 많지 않아." ...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해요."
(2권 177쪽)

그녀는 마당 쪽으로 난 창문의 레이스 커튼을 치고, 방의 전등을 껐다. 그녀는 달빛 속에서 옷을 벗었다. 그리고 목걸이를 풀고, 팔찌 시계를 풀고, 벨벳 원피스를 벗었다. ... / 그녀가 팬티 스타킹을 둘둘 말아 내리면서 벗고 있을 때, 음악은 레이 찰스의 <조지아 온 마이 마인드>로 바뀌어 있었다.

(2권 290쪽)

"이젠 옷을 입어도 될까?" 하고 나는 물었다.
여자보다 먼저 옷을 입지 않는 것이 나의 방식이다. 흔히 말하는 예의라는 것인지도 모른다."
(2권 310쪽)

하루키의 소설에 드물지 않게 나오는 남녀의 사랑 이야기.
그가 소설가인 한, 인류의 영원한 숙제 '사랑'을 피해갈 수는 없겠지요.
그가 그리는 사랑 이야기는 너무나 친근하고 섬세하고 아름답습니다.
그래서 제가 하루키를 좋아하는 것이기도 할 겁니다.

하루키가 그리는 남녀의 사랑 이야기에는 거의 어김없이(!)^^ 섹스가 나옵니다.
'19금'을 넘나드는 면이 없지 않으나, 그는 대한민국 작가가 아니기에,
심한 도덕률을 들이대는 것은 공평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의 소설에 간혹 등장하는 섹스신^^이, 저에게는 너무 예쁘게만 다가오는 것이 사실입니다.
싸구려틱하게, 스토리의 전개와 부조화한다는 느낌도 전혀 없구요. ^^

그리고 하루키의 소설을 횡으로 종으로 가로지르는 음악과 노래와 가수들.
이것도 저는 얼마나 공감이 가고, 좋은지 모릅니다.
인용한 것에서 보듯이, 그녀를 기다리는(?) 중에도 그의 귀는 음악을 놓치지 않습니다.
레이 찰스를 이야기하고 노래 제목을 적고 있지요.
제가 읽은 책과, 들은 노래가, 서로 매치되어 연상되는 일과 통하는 면이 있다고...
마구 아전인수적인 해석을 합니다. ^^

 
 

 
4. 반복적인 일상

참으로 상부의 인간들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구멍을 팠더니 그 다음은 메우라고 하고, 메웠더니 다시 그것을 파라고 한다. 골탕을 먹는 건 늘 나같이 현장에서 직무를 수행하는 말단 직원인 것이다.
(1권 51쪽)

더더구나 기술이 향상되어서 ... 능숙하게 처리하게 되면 될수록, 그 작업을 계속하는 데서 오는 지루함과 공허함은 더욱더 선명하게 두드러졌다.
(1권 273쪽)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들의 영위법은 언제나 이렇다. 공들여 쌓아 올리는 데는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리지만, 그것을 파괴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고작해야 빛이 반짝하는 한 순간이다.
(1권 281쪽)

첫번째 인용한 대목에서 시시포스(시지프스, Sisyphos)가 떠올랐습니다.
우리의 삶이 시시포스적인 데가 없지 않지요. 매일 반복되는 일상.
그리고 회사에선 위에서 내려오는, 알다가도 모를 지시들.
그것들을 참 깔끔하게 적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공감하는 바가 컸고요.
두번째 인용한 부분에서는 '인간 소외'라는 절절한 주제가 떠올랐습니다.

 
 

 
5. 사람들, 세상, 과학

"과학을 악용하는 것은 과학을 선용하는 것과 더불어 현대 문명을 위기적 상황에 부딪히게 하고 있네."
(1권 48쪽)

" ... 세상 사람들은 살찌는 걸 싫어하는 모양이지만, 내 생각에는 잘못된 방식으로 살찌기 때문인 것 같아. 그래서 살찌는 것 때문에 건강이 나빠진다거나 아름다움을 상실하거나 하는 것이지. 그러나 올바른 방식으로 살찌면 그런 일은 절대로 없어. 인생은 충실해지고 성욕은 왕성해지고 두뇌는 명석하게 되는 거네. ..."
(1권 70쪽)

"나도 자네가 고통을 당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네. 하지만 이것은 누구나 다 겪어야 하는 일일세. 그러니까 자네도 참고 견디지 않으면 안 되는 거야. 그러면 그 다음에는 구원이 찾아올 걸세. ..."
(1권 160쪽)

짐 모리슨이 죽고 나서 10년 이상이 지났지만, 도어즈의 음악을 틀면서 달리고 있는 택시를 만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세상에는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변하지 않는 것은 언제까지나 변하지 않는 것이다.
(2권 222쪽)

하루키의 '수다'가 단순한 수다가 아니라 깊이있는 사고와 사유의 산물로 와닿는 것은,
바로 이같은 사람에 대한, 세상에 대한, ... 그의 깊은 생각이 깃들어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어찌 보면 세상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주류적인' 마인드가 아니라
하루키의 다분히 '아웃사이더적인' 심성으로 읽혀서 더 공감이 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생각이나 삶이 좀 아웃사이더적인 면이 있는 것이 사실이거든요. 공감 100만배...! 큭.

 

 

6. 꿈꾸는 세상, 유토피아(?)

" ... 목적이 없는 행위, 진보도 없는 노력, 아무 데에도 다다르지 않는 보행, 멋지다고 생각지 않나? 아무도 상처를 입지 않으며, 누구에게도 상처를 입히지 않지. 아무도 앞질러 가지 않으며 누구에게도 추월당하지도 않네. 승리도 없고, 패배도 없는 걸세."
(2권 210쪽)

" ... 여기서는 아무도 서로에게 상처를 주지 않고, 다투지도 않아. 생활은 검소하지만, 그 나름대로 부족함이 없어. 그리고 모두가 평등하지. 욕을 하는 사람도 없고, 무언가를 놓고 서로 빼앗는 법도 없어. 노동은 하지만, 모두가 자기의 노동을 즐기고 있어. 그건 노동을 위한 순수한 노동으로, 누군가에게 강요 당하거나, 싫은 걸 억지로 하는 것은 아니거든. 남을 부러워하는 사람도 없고, 한탄하는 사람도 없고, 고민하는 사람도 없어."
(2권 237쪽)

너무 너무 공감하는 대사들이었습니다. 너무 멋진, 주옥같은 대사들이었습니다.
제가 표현하는 식으로 하자면, 수단으로서의 삶이 아니라 목적으로서의 삶...!
하루키가 바로 그것을 이야기하고자 한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제가 꿈꾸는^^ 세상이 바로 저런 특징을 가지고 있거든요.
아, 제가 말하는 세상은 대한민국이 아니라 제가 살고 있는 삶입니다.
가능하다면 그것이 온 세상으로 확장되어도 좋구요. ^^




하루키의 책들 가운데, 아직 제가 안 읽은 책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지 모릅니다.
물론, 안 읽은 책이 없다고 하더라도, 또 읽는 맛이 쏠쏠할테니 불행한 것은 아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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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0318 수 11:30 ... 12:30  선별인용
2009 0318 수 16:00 ... 17:00  비프리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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