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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할머니 제사를 지낸다. 아버지는 할머니의 장남이고 나는 아버지의 큰 아들이다. 나는 돌아가신 할머니의 제사를 지낸다(돌아가신 할아버지의 제사도 지내고 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계시지만 이런 저런 여건 상 작년부터는 나와 집사람이 장도 보고 음식도 만들고 제사를 준비한다. 밤에 부모님이 건너 오신다. 지지난 주에 그렇게 또 한번의 할머니의 제사를 지냈다.



2.

할머니를 생각하면 좋은 기억이 없다. 우리를(나를 동생을 누이들을) 참 잘(?) 대해 주어 안 좋은 기억만 남아 있다. 내가 태어나기 전은 알 수 없지만 내가 기억하는 어린 시절에 할머니는 외손주가 좋다며 작은 고모 집에 살고 있었다(딸이 좋았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후로도 오랫동안 고모 집에 살았다. 며느리(그러니까 나의 어머니)를 편하게(?) 해주려고 그런 것은 절대 아니다, 라고 단언할 수 있다! 

나나 동생이나 방학에 고모 집에 며칠씩 놀러가 지낸 적이 많다. 고모네 사촌이 우리 집에 와서 며칠씩 놀다간 적도 그만큼 있다. 우리가 놀러가 있거나 고종 사촌이 놀러와 있거나 할 때, 할머니는 외손주를 편애했다. 그리고 그것은 친손자에 대한 박대(혹은 홀대)로 표출되었다. 목욕을 시켜준다며 미지근한 물과 뜨거운 물을 가려서 끼얹은 일을 기억한다. 외손주에게는 미지근한 물을 만들어, 친손자에게는 뜨거운 물을 그대로, 할머니는 끼얹었다. 샌드위치를 만들어 먹일 때 식빵의 속과 테두리를 가려서 나눠 먹였던 일도 생생히 기억한다. 외손주에게는 보드라운 식빵의 속부분을, 친손자에게는 거친 테두리 부분을, 할머니는 나눠 주었다.

초등학교 다니던 시절에는, 친척들과 왕래하며 잘 지내야 한다는 아버지의 지론에 밀려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모 집에 가서 지내다 오곤 했지만, 머리가 굵어지고 나서부터는 고모 집에 가지 않았다. 할머니가 거기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할머니의 행동으로 인해 고종 사촌들과 친해지기 어려웠다. 같은 또래의 떠받들어지는 자에게, 박대(혹은 홀대) 받는 자가 좋은 감정 가질 수 있겠는가. 그것도 아직 코흘리개 어린 나이라면.

할머니가 외손주를 좋아라 할 때 나의 작은 어머니는 가끔 할머니에게 물었다. "어머니 돌아가시면 제사는 친손자들이 지낼 텐데, 친손자들도 좀 좋아해야 하지 않으시느냐"고. 할머니의 대답은 늘 한결 같았다. 당신은 "친손자 같은 거 필요없다!"고, "외손주가 좋다"고. 대답은 늘 한결 같았다. 


3.

내 나이 이십대 중반 무렵, 작은 고모네 식구는 미국으로 이민 갔고 할머니는 낙동강 오리알이 되었다. 어느 날부터 우리 집에 들어와 살기 시작했다. 할머니의 장남인 아버지는 할머니를 아무 말 없이 받아들였다. 좁은 집의 안방을 할머니에게 내어 주고 아버지와 어머니는 그때부터 거실에서 생활했다. 어머니는 내심 서운했을 텐데 표를 내지 않으셨다. 마음 고생이 많으셨을 거다.

할머니의 
마지막 삼사년은 어머니가 할머니 뒤치다꺼리를 하느라 특히 고생이 많았다. 할머니가 거동을 하지 못한 것은 아니지만 말년에 할머니는 매일 똥을 쌌고 어머니는 이불 빨래를 했고 기저귀를 갈았다. 우리들이 할 일은 아니라고 당신께서 도맡아 하셨다. 어머니가 할머니 때문에 고생이 많았다. 


4.

그러다 어느 날 할머니는 돌아가셨다. 훅 촛불이 꺼지듯. 툭 낙엽이 떨어지듯. 그렇게 가셨다. 그리고 우리는 할머니 제사를 지낸다. 열 해째다. 작년부터는 나와 집사람이 제사를 준비한다. 

돌아가신 할머니에 대해서 (여느 손자들이 말하는 것과 같은 그런) 애틋한 마음은 없다. 그립거나 보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다. 솔직히 그렇다. 무슨 그리워할 만한 기억이 있어서 애틋하고 보고 싶은 마음이 들겠는가. 전혀 그런 마음이 들지 않게 평생 친손주들을 대해 주었다. (그리워 하지 않게 해주어서 고맙다고 해야할까.)



5.

최근에 이런 생각이 든다. 
아버지는 어떠실까. 아버지는 할머니가 보고 싶을 때가 있지 않을까. 할머니 제사를 열 해째 지내면서 이런 생각이 든다. 아버지에게는 엄마가 아닌가. 할머니가 보고 싶을 때 아버지는 어떻게 견디실까. 어머니가 살아계신 나로서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아버지 마음이 많이 시릴 때가 있겠다, 는 정도는 짐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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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1026 수 07:55 ... 08:35  거의작성
2011 1026 수 11:20 ... 11:40  비프리박
 

p.s.
서울시의 현재와 미래를 바꿀 투표가 실시되는 날입니다. 경기도민인 저는 투표를 하지 않지만, 그래서 이런 무관한 글을 올리고 있지만(^^), 하지만 따지고 보면 서울은 대한민국의 수도인지라 저와 무관하다 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저는 투표를 할 수 없지만, 이 글을 읽으시는 당신이 서울특별시민이라면 투표를 하셔야겠죠. 최선을 고를 수 없다면 차선이라도 고르시고 차선도 고를 수 없다면 최악만이라도 피하는 게 맞겠죠. 투표를 하지 않을 365가지 핑계는 쓰레기통에나 처박아 버리시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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