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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만큼은 아닐지라도 혁명은 시의 주된 연료다. 사랑과 혁명은 불거진 정념이라는 점에서 닮았고, 시는 그것을 담기 알맞은 그릇이다. 뛰어난 연시(戀詩)가 대체로 이별의 시이듯, 뛰어난 혁명시도 흔히 좌절한 혁명의 시다. 혁명의 좌절은 그 주체의 불행이겠으나 시의 잠재적 행복이다. 성공한 혁명이 낳은 시는 공식주의 문학의 틀에 갇히기 십상이니 말이다. 그 점에서 1960년 4월혁명의 좌절은 역설적으로 시의 축복이었는지도 모른다. 
(이 책, 57쪽, <기다림 또는 그리움, 4·19의 언어>에서)


꽤나(?) 읽어온 고종석입니다. 제가 고종석의 책은 챙겨 읽는 독자이지 말입니다. 이렇게 챙겨 읽는 책과 저자는 배신하는 법이 없습니다. ^^ 고종석이 또 우리말에 관해서 어떤 깊은 생각을 적어내려갈까 적잖이 궁금했던 책입니다. 이 책은 우리말에 대한 그의 관심과 사랑의 소산이라 불러 부족함이 없습니다. 앞서 나온 「사랑의 말, 말들의 사랑」, 「감염된 언어」, 「언문세설」, 「국어의 풍경들」 같은 책의 연장선에 놓여 있는 것이죠.
 
고종석, 말들의 풍경:고종석의 한국어 산책, 개마고원, 2007.   * 총 376쪽.

읽는 내내 즐거웠던 책입니다. 후다닥 읽어내려가지 않고 야금야금 천천히 음미하고 싶은 책이었습니다. 물론, 내용 자체가 그것을 허락했을지는 미지수입니다. ^^ 우리말에 관한 생각 혹은 애정이 있는 분이라면 일독을 권하고 싶은 책입니다. 고종석 '빠'라는 칭호를 선사받는대도 어쩔 수 없는 저는 이 책을 이독(二讀)하고 싶습니다. 큭.

2011년을 고종석의 이 책으로 열게 되어 기쁩니다. 읽는 게 즐거움인 고종석이어서 그렇고 공감하면서 한 수 배우면서 읽은 책이어서 그렇습니다. 1월 1일(토)부터 읽기 시작해서 1월 6일(목)에 독파할 때까지 내내 독자의 호사를 누렸습니다.
 


말들의 풍경 - 10점
  고종석 지음/개마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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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들의 풍경」, 우리말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 낳은 한국어 에세이.


고종석의 「말들의 풍경」. 챙겨 읽는 고종석의 책에 또 한 권의 책을 얹는다.


 

1. 이 책은? 고종석은?

이 책은 고종석이 "젊은 시절 이래 신문기자로서, 언어학도로서 그리고 작가로서" 묶여 있는 우리말에 대한 관심이 낳은 결과물입니다. 포스트 초입에 적은 그의 전작을 잇는 연장선에 놓여 있습니다. 그가 <자서>에서 밝히고 있는 것처럼 "이 책은 체계적인 언어학 교과서가 아니라 언어에 대한 에세이"이고 "언어를 안에서 (언어학의 틀로) 보는 관점과 바깥에서 (사회적, 심리적 또는 정치적 틀로) 보는 관점이 뒤섞여 있"는 우리말에 관한 에세이입니다. 우리말에 관심이 있는 일반 독자에게 무리 없이 읽힐만한 책입니다.

게다가 그는 '대중적 글쓰기'의 첨단에 서있는 기자였고 현직 언론인이지 말입니다. 현재 <한국일보> 비상임 논설위원이라고 책 표지 날개에 나와있군요. 비상임 객원의 헐거움을 얻은 이태 전까지 스물두 해 동안 <코리아타임스> <한겨레> <시사저널> <한국일보> 등에서 기자, 주재기자, 편집위원, 논설위원으로 일했다고도 적혀 있습니다. 그의 책이 독자에게 무리 없이 읽히는 이유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겠지요. 물론 그의 글에는 저같은 독자를 빨아들이는 그 이상의 무언가가 있습니다만. ^^


 
 
2. 자음과 모음에 관한 생각
 
'ㄹ'은 흐른다. 술이 철철 흐르고 물이 졸졸 흐르듯, 스르르, 사르르, 까르르, 조르르, 함치르르, 찌르르, 번지르르, 반드르르, 야드르르, 보그르르, 가르르르, 와르르, 후루루 같은 의성어·의태어에서 'ㄹ'은 미끄러지며 흐른다. ...
고려속요 「청산별곡」은 'ㄹ'을 타고 흐른다. 첫 두 연에서 이미 이 노래는 'ㄹ'의 향연이다. 「청산별곡」은 흐르고 구르고 미끄러진다.
(43쪽, <「청산별곡靑山別曲」 흘러가며 튀어오르기>에서)
 
공감 또 공감합니다. 저 또한 자음과 모음에 관해 이런 저런 생각을 하는 편이거든요. 이름이 'ㄱ'으로 끝나면 대개 남성적이고 'ㄴ'으로 끝나면 자주 여성적이지요. 예컨대, '민석'은 남자이름일 테지만 '민선'은 여자이름일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이름 끝의 '혁'과 '현'에서도 비슷한 느낌을 받습니다. 'ㄱ'과 'ㄴ'의 차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렇지 않다'며 반례를 수도 없이 들 수 있긴 하겠습니다만, 이렇게 자음과 모음에 관한 생각을 조금은 해오던 터라 고종석의 자음과 모음에 관한 생각은 즐겁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고종석은 자신의 글에 관해 다음과 고백을 하고 있기도 합니다. 
"서가에 꽂혀 있는 김현 전집 가운데서 아무 거나 뽑아 들어 띄엄띄엄 읽노라면 문득 가슴이 울렁거린다. 거기에 내 글의 원형이 있기 때문이다. 세상을 바라보는 눈에서나 그 눈길을 담아내는 문체에서나 내 글은 김현의 글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있지만, 그리고 격조와 깊이에서 도저히 김현의 글과 견줄 수 없지만, 그 근원은, 행복해라, 김현의 글이었다." (236쪽)

 
 

 
3. 지금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입말에 대한 생각
 
황우석 사건은 ... 그 전까지 주로 젊은 네티즌들 사이에 통용되던 접미사'-빠'와 '-까'를 인터넷 바깥으로까지 끌어내 일반인들의 입에 널리 오르내리게 만들었다. '-빠'는 어떤 사람의 열성적 지지자나 열렬한 팬을 뜻한다. 남성 연예인을 '오빠'라 부르며 따라다니는 극성 여성 팬을 가리키는 '빠순이'(또는 집합적으로 '오빠부대')가 신종 접미사의 어원일 것이다. '빠순이'는 '오빠부대'의 일원인 만큼 대체로 여중생이나 여고생이기 마련이지만, '-빠'는 '빠순이나' '오빠부대'의 성적(性的) 세대적 벽을 허물었다. 그래서 황빠는 60대 남성일 수도 있다.
(190쪽, <가르랑말과 으르렁말, '-빠'와 '-까'의 생태학>에서)
 
아마 누가 나서서 기록해두지 않는다면 의미가 알쏭달쏭할 예문으로만 남을 우리의 입말에 관한 기록을 고종석은 이 책에 담고 있습니다. 수십 수백년이 흐른 후에, 우리가 중세 한국어를 바라보듯 미래의 후손들이 바라볼 지금의 입말들을 고종석은 기록하고 정리하고 해석합니다. 인터넷 상에서 쓰이는 표현이든 웹을 벗어나 현실로 나온 말이든 가리지 않습니다. 고종석에 의해 기록되고 정리되고 해석됩니다. 조금 멀리 상상하자면 후세들이 고종석의 글로 '고어'를 연구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마 좋은 길잡이가 되어줄 테죠. 물론, 현재를 사는 우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읽을 수 있는 글들이고요.
 
 

 
4. '언론인'  글쟁이 고종석의 언론에 대한 바른 생각
 
오늘 우리가 누리는 언론 자유는 1987년 6월 항쟁 이후 풀리기 시작한 정치적 태엽의 동역학 속에서 쟁취됐다. 그러니, 박정희 유신체제와 전두환 5공체제의 제도언론에 만족하던 사람들이 오늘날[=2006년 현재] 한국에 언론자유가 부족하다고 투덜대는 것은 지나치다. 특히 5공 시절 청와대에서 문공부를 거쳐 내려보낸 보도지침에 고분고분 순응하던 언론 종사자들이 지금 정부[=노무현 정부]의 언론 탄압을 운위하는 것은 희극적이다 못해 역겹다.   * [   ]는 비프리박.
(72쪽, <언론의 자유, 그 빛과 그림자>에서)
 
고종석은 신문사에서 기자로 일했고 지금도 신문사에 한 발을 걸치고 있습니다. 언론에 대한 관심이 없을 수 없습니다. 기자 출신으로, 현직 논설위원으로 언론과 관련하여 벌어지는 일들을 정치적으로 올바른 관점에서 바라봅니다. 이런 글에까지 그의 장점이라 할 매끄럽고 아름다운 문체가 개입한다는 겁니다. 읽는 이로서 즐거운 일입니다.

기자 출신 소설가 김훈이 떠오릅니다. 논설위원 겸 글쟁이였던 정운영을 생각합니다. 진득하게 파고드는 김훈의 문체와 (고종석의 표현대로) 화사한, 너무도 화사한 정운영의 글 못지 않은 매끄러움과 아름다움을 고종석의 글에서 만납니다. 그래서 저는 김훈과 정운영한테만큼 고종석에 빠져 있는지도 모릅니다.

 
 

 
5. 가뭇없다,무람없다,버성기다,어기차다, ... 우리말을 사랑하는 세심한 언어사용자
 
그것들이 난데없이 나타난 만큼이나 어느 순간 가뭇없이 사라져버릴 것이다. (307쪽)
'언니'는, ... 여성종업원을 무람없이 부를 때 사용되기도 한다. (304쪽)   * 밑줄은 비프리박.

 
이전에 읽은 고종석의 책에서도 느꼈던 것들인데요. 고종석은 아름다운 우리말을 잘도 찾아내어^^ 적절한 곳에 꽂습니다. 일상이나 다른 책에서 잘 접하지 못한 우리말들인데요. 알게 되었다, 배웠다는 느낌을 주는 표현들이 적지 않습니다. 더욱 좋은 것은 그 단어들이 적절한 문맥에 적절학 꽂혀 있어서 국어사전을 뒤적이지 않고도 뜻을 가늠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어찌 보면 언어를 내면화하는 가장 바람직한 방법이기도 합니다.

위에 예로 든 '가뭇없이' '무람없이' 외에도 (틈이 벌어져 있다는 의미의) '버성기다'나 (마음먹은 일을 굽히지 않는다는 뜻의) '어기차다'(108쪽)도 기억에 남아있고 (제 느낌으로 이제 고종석스럽다는 생각마저 드는) '-할 테다' 어미도 자주 접합니다. 앞서 읽은 다른 책에서 감지되기 시작한 '-할 테다'는 자신의 의지를 담은 미래형 어미가 아니라 단정 혹은 추측을 나타내는 '-할 터이다'의 줄임말입니다. 우리말들 잘 구사하면 문장에 멋과 맛이 가미되지 말입니다.

그의 말대로 우리말에 대한 사랑이 "정확하고 아름다운 글을 쓰려는 언어사용자들 각자의 세심한 노력 속에 있다"(268쪽)고 한다면, 고종석은 우리말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는 세심한 언어사용자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한 명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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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0107 금 06:10 ... 08:40 비프리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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