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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돌아보면 어린 시절에 책읽기를 아주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싫어하지도 않았습니다.
읽고 싶은 책이 불어나기 시작한 대학을 졸업할 무렵부터 읽기를 즐긴 것 같습니다.
생계만 해결이 된다면 평생 즐겁게 읽으면서 살 수 있다는 생각을 한 것도 이때쯤입니다.
지금의 직업에, 무언가를 끊임없이 계속 읽는다는 점에서, 만족하는 면이 있습니다.

사람마다 맛있는 음식이 있습니다.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은 그 자체로서 행복이지요.
그런데 간혹 그 맛있는 음식을 내 의지와 무관하게 '먹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먹고 싶은 음식이 먹어야 할 음식으로 전환할 때 행복 게이지는 저감됩니다.
읽고 싶은 책이 읽어야 할 텍스트로 트랜스포밍할 때 읽는 즐거움은 감소합니다.

저는 학원 선생이고 지금은 내신대비 기간입니다. 수업을 위해 미리 읽고 검토해야 할 텍스트는 매일 엄청난 파도로 밀려듭니다. 출근 후 수업 전까지 누리는 다소 여유로운 시간은 진작에 교재 연구 시간으로 탈바꿈했고, 퇴근 후부터 출근 전까지의 달콤한 휴식 시간도 3주째 텍스트 읽기에 할애되고 있습니다. 관련해서 떠오른 몇가지 생각을 적어봅니다.

 


    바쁜 시즌, 할 일이 많을 때에는 매일매일 눈앞에 닥치는 일만 처리하는 것도.

달리는 걸 좋아하여 100km 달리기에 도전한 무라카미 하루키.
어느 시점부터 그는 100km가 아닌 3m 앞을 달린다.
일본 사로마호수 100km 울트라 마라톤 완주.
 


무라카미 하루키는 100km 마라톤에 참가한 적이 있다.
사로마 호수를 달리는 100km 울트라 마라톤은 매년 6월 홋카이도에서 열린다.
당신은 100킬로를 쉬지 않고 계속 달린 적이 있는가? 하루키는 이 대회에 참여한다.
출발 후 그는 묵묵히 달린다. 60km를 넘어서 하루키는 온몸의 극심한 호소를 경험한다.
러너들이 말하는 소위 사점(死點, dead point)을 체험한다.
하루키가 자신을 달랬던 장면에 관해 적은 대목이 인상적이다.

... 자기가 감지하는 세계를 되도록 좁게 한정하려고 애쓴다. 내가 보고 있는 것은 겨우 3미터 정도 앞의 지면으로, 그보다 앞은 알 수 없다. 내가 당면한 세계는 기껏해야 3미터 앞에서 끝나고 있다. 그 앞의 일을 생각할 필요는 없다. 하늘도, 바람도, 풀도, 그 풀을 먹는 소들도, 구경꾼도, 성원도, 호수도, 소설도, 진실도, 과거도, 기억도, 나에게 있어서는 더 이상 아무런 관계도 없는 사물인 것이다. 여기서부터 3미터 앞의 지점까지 다리를 움직인다. ...
(무라카미 하루키,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171쪽)

하루키의, 그저 기계적으로 3미터 앞을 달려나갈 뿐이라는 말이 와닿는다.
크기를 알 수 없는 정도의 일이 몰려들 때 그 크기를 가늠하려 하기 보다 눈 앞의 일만 해낸다.
시야를 눈 앞으로 국한한다. 눈 앞의 3m만 달리면 수십km도 주파된다. (라는 믿음을 갖고. ^^)


열 몇개 학교의 시험대비를 위해 읽고 검토해야 할 텍스트는 끝없이 밀려든다.
페이지 개념으로 분량을 생각하면 그 텍스트의 양은 헤아릴 수 없는 크기로 나를 압도한다.
매일매일 읽어야 하는 나는, 하루키의 3미터 앞처럼, 그날 읽을 텍스트로만 시야를 좁힌다.
그날 수업에 필요한 교재 본문에 시야를 국한하고서, 한 페이지씩 읽는다. 한 줄씩 읽는다.
멀리 내다보지 말고 크기를 가늠하려 들지 않고, 그저 한 페이지씩, 한 줄씩, 읽어 나간다.



감히, 해전의 이순신을 연상한다. 김훈이 <칼의 노래> 곳곳에서 적었던 장면들을 떠올린다.
명량의 충무공 앞에 적선은 끝이 없다. 헤아릴 수 없는 수의 적선과 적들이 눈 앞에 펼쳐진다.
김훈은 적을 '부순다'고 표현한다. 나는 이순신이 그렇게 적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부수어도 부수어도 끝없이 달려드는 적선과 적들 앞에서 이순신이 했던 생각은 두가지 같다.
적을 부수는 것이 벼를 베는 농사와 다르지 않다. 끝없이 베고 또 베어야 하는 농사다.
적은 전체로서 부수는 것이 아니라 눈앞에 달려드는 적을 하나하나 부술 따름이다.

(책의 곳곳에서 느낀 인상인지라 구체적으로 출처를 밝히기 어렵다. 책을 두번 뒤적였으나 단락으로 딱 떨어지는 인용할 수 있는 대목이 눈에 띄지 않는다. 98쪽~ & 240쪽~ 참조.)

그저 눈앞으로 달려드는 적들을 하나하나 부순다는 그 대목이 크게 와닿는다.
크기를 알 수 없는 적이 몰려들 때 적의 수효를 가늠하기 보다 눈 앞의 적만 부수면 된다.
시야를 눈 앞으로 국한하고 눈 앞의 적을 부수다 보면 결국 적은 파괴되기 마련이다.



읽어야 할 텍스트가 끝도 없다. 교재의 분량과 텍스트의 양을 어림잡다 포기한다.
열 몇권의 교재에 족히 30개 과는 넘지 싶은  범위는 이제 크기가 실감조차 되지 않는다.
매회 30 지문씩 떨어지는 온갖 모의고사가 몇회 쌓이다 보면 분량은 가늠의 영역을 벗어난다.
부수어도 부수어도 끝없이 달려드는 텍스트! 전체를 보지 않고 그저 그날의 텍스트만 본다.
매일매일 그날그날 필요한 텍스트를 읽을 뿐이다. 베고 또 베어야 하는 농사와 다르지 않다.
전체로서가 아닌 한쪽한쪽 한줄한줄 읽고 텍스트를 부수어(讀破) 나갈 따름이다.




끝이 없어 보여도 끝이 없지는 않겠지요. 아직 열흘 남짓 바쁜 날들이 남아 있지만 큰 파도는 지난 금요일로 끝이 난 것 같습니다. 출근 후 텍스트 읽으면서 김밥 혹은 삼각김밥으로 한끼 식사를 대신하는 것도 3주만에 이제 끝입니다. 이번주부터는 바쁘긴 해도 나가서 밥은 먹을 수 있을 듯 합니다. 회사에선 역시 사무실 동료들과 밥을 함께 먹어야 제맛이지 말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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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0424 토 07:50 ... 09:40  비프리박
2010 0426 월 09:00  예약발행


p.s.
작년에 비슷한 시기, 저는 이런(↓) 글을 기록으로 남겼었군요. ^^
▩ 고3 아이들과 함께 하는 내신대비의 스케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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