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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민중항쟁의 찬연했던 불꽃은 그 새벽 계엄군의 캐터필러 소리와 함께 스러져 버렸으나 그 뜨거운 불씨마저 짓밟혀 버린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 불씨는 그날 이후 살아남은 모든 사람들의 가슴을 결코 꺼지지 않는 빛으로 지켜 주고 있는 것이다.   (247쪽에서)

올해 들어 마음 먹은 광주항쟁 관련 읽기의 첫걸음과도 같은 책이었습니다. 서슬퍼런 전두환 치하에서 출간된 책이란 것이 믿어지지 않는 이 책은 광주항쟁의 피어린 기록인 동시에 촘촘한 재구성을 시도한 책입니다.

전남사회운동협의회(엮),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황석영(기록), 풀빛, 1985.
   * 본문 257쪽.   * 총 309쪽(희생자, 부상자, 구속자 자료집 포함).

광주항쟁 관련 책읽기는 이후에 「광주여 말하라:광주민중항쟁 증언록」 그리고 「꽃잎처럼:5월광주대표소설집」으로 이어졌습니다. 이어서 읽을 책들이 몇 권 더 있습니다만, 갈증(?)도 어느 정도 해소되었고 다른 책들에 대한 관심 때문에 잠시 밀려나 있군요. 다시 기회를 만들어 광주항쟁 관련 읽기는 이어가야겠죠.

2009년 5월 22일(금)부터 5월 26일(화)까지 읽었습니다. 분노를 참기 힘들었고 울분이 절로 끓어올랐습니다. 읽는 5일 내내 분노와 울분를 벗삼았습니다. 그 전이나 그후로 지금까지도 그것은 변화가 없긴 합니다만. -.-;;;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광주항쟁의 피어린 기록(황석영)


( 전남사회운동협의회의 자료를 바탕으로 황석영이 기록한, 광주 5월 민중항쟁의 기록. )


 

1. 이 책은? 이 책의 구성은?

이 책은 '2009년 봄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황석영이 강을 건너기 전 젊은 시절(?)에 쓴 책입니다. 광주항쟁 관련, 학살의 기록과 항쟁의 기록을 전남사회운동협의회라는 단체에서 수집했던 것 같고 그것을 바탕으로 황석영이 광주항쟁을 촘촘하게 재구성해놓은 책입니다. 어쩌면 정부나 학계가 아닌 문인의 손에 의해서 이렇게 기록되고 재구성된 것으로는 가히 독보적인 책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이 책은 일자별 시간대별 재구성을 서술방식으로 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대상을 광주 시내로만 국한하지 않고 있습니다. 학살과 항쟁에 관한 것인 한 주변 지역을 아우르고 있습니다. 광주항쟁을 다각적이고 총체적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소중한 책은 현재 절판입니다. ㅠ.ㅠ (예전에 구입해 놓길 잘했지, 그럽니다.)
라고 적고 보니, 현재 몇몇 인터넷 서점에서 구할 수 있군요. (← 2009 1123 월 수정.)

이 책은 다음과 같은 구성으로 이뤄져있습니다.
(더 깊이 들어간 소제목들이 있으나 그것은 지면 관계상 생략합니다.)


[1] 밀려드는 역사의 파도
   1. 역량의 성숙
   2. 민중항쟁의 발단
[2] 피와 눈물의 5일간
   3. 산발적이고 수동적인 저항
   4. 적극적 공세로의 전환
   5. 전면적인 민중항쟁
   6. 무장투쟁과 승리의 쟁취
[3] 광주여! 광주여! 광주여!
   7. 해방기간 I - 5월 22일 목요일 : 항쟁 5일째
   8. 해방기간 II - 5월 23일 금요일 : 항쟁 6일째
   9. 해방기간 III - 5월 24일 토요일 : 항쟁 7일째
   10. 해방기간 IV - 5월 25일 일요일 : 항쟁 8일째
   11. 해방기간 V - 5월 26일 월요일 : 항쟁 9일째
   12. 항쟁의 확산
[4] 마지막 그리고 새로운 시작
   13. 항쟁의 완성
   14. 끝나지 않은 투쟁
[부록]
   - 희생자 및 부상자 명단
   - 구속자 명단
 
 
 

 
2. 학살의 전주

정부는 (1980년) 5월 17일 24시를 기해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한다고 동일 23시 40분에 이규현 문공장관이 발표했다. ... 계엄 확대조치는, 20년간의 박정희 군사독재체제가 유신체제로 굳어지면서 계속되어 왔던 군사적 탄압을 종식시킬 수 있었고, 또한 어느 정도는 군부의 영향력을 배제할 수 있었던 1980년 초반의 '민주화의 봄'에 대한 전면적 부정임과 동시에 변형된 형태의 유신군부가 그들의 숨겨진 마각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첫 발걸음이었다. ... 바로 몇 시간 뒤에 닥쳐올 살륙을 예견케 하는 군 일부의 반란이었다.
(33쪽, <2. 피와 눈물의 5일간> '확대 비상계엄의 선포'에서)

웬 뜬금없는 비상계엄? 이란 말이 나올 법한 조치였습니다. 1980년 초부터 이어져온 전국민적인 민주화의 열망을 가만히 놔뒀다가는(?) 권력을 빼앗기겠다는 다급함에서 나온 (황석영의 말대로) 군부의 반란으로 규정지어 마땅한 조치였습니다.

 

 
3. 살육의 시작

(1980년 5월 18일 11시 10분경) 군용 트럭 30여 대에 분승한 공수부대가 도청앞과 광남로 사거리에 진출하여 시위 군중을 포위, 압축하기 시작했다. ... 그들은 마치 며칠 굶겨 놓은 맹수가 먹음직한 고깃덩어리를 발견한 것처럼 시위 군중을 덮쳤다. ... 곤봉과 총 개머리판, 대검으로 때리고 휘두르고 찌르면서 시위대의 중심부로 파고든 공수대는 그들의 위장군복마저 피로 벌겋게 물들였다.
(57쪽, <2. 피와 눈물의 5일간> '학생시위에서 민중봉기로'에서)

아무리 시위진압이라지만 자국민의 시위대에 무장 공수부대원을 투입해서 학살하는 나라가 있을까요. 그리고 그날의 상황은 '진압'씩이나 해야할 상황도 아니었습니다. 그냥 마음 먹고 계획대로 자행한 학살이자 살육이라고 밖에는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당하는 광주 시민들의 심경은 어땠을까요. ㅜ.ㅜ
 
 

 
4. 항쟁의 승리

(1980년 5월 21일 오후) 시민군의 승리는 바로 눈앞에 와 있었다.
(오후) 5시 30분, 계엄군의 총퇴각이 결정되었다. 그들의 퇴각은 허둥지둥한 패잔병의 도주였다. ... 계엄군은 소속 부대별로 조선대 쪽을 향해 퇴각했다. 그리고 이들은 곧 어둠을 이용하여 외곽도로로 전 부대가 빠져나갔다.
5월 21일 저녁 8시, 드디어 시민군은 광주시 전역에서 계엄군을 몰아내고 승리를 쟁취한 것이다.
피의 항쟁 4일째, 계엄군은 온 생애를 던지고 전진하는 시민군의 과감한 공격 앞에 쫓겨나고 말았다. 차량을 몰고 육신과 차체가 불덩이가 되어 산화한 젊은이들, 돌멩이 하나로 기관총과 대결하던 소년들, 아스팔트 위에서 죽어가던 맨손의 시민들, 그리고 총을 쏘며 전투를 벌이다 어느 길 모퉁이에서 숨져간 무장 시민군들, 이름없는 투사들의 피묻은 얼굴들이 캄캄한 도청의 밤하늘 위로 별똥처럼 스쳐 지나가는 순간이었다. 조직도 없고 훈련도 받지 못한 채 군의 정예 특전대를 몰아낸 시민군은 이제 광주 민주공통체의 군대로서 해방의 값진 결실을 지켜내야만 하였다.
(126-129쪽, <2. 피와 눈물의 5일간> '도청 점령'에서)

항쟁 4일째, 그러니까 5월 21일 저녁 시민군은 도청을 탈환(!)합니다. 쿠데타 세력이 내려보낸 계엄군을 도청에서 몰아낸 것이죠. 광주 외곽으로 퇴각하게 만들었습니다. '학살'에 굴하지 않는 광주 시민들, 그들은 역사적 자부심을 가질만합니다. 황석영이 적고 있는 소감은 읽는 사람의 심금을 울리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5. 도청 진압작전, 항쟁지도부의 마지막

(1980년 5월 27일) 새벽 2시 30분, 도청 전체에 비상이 걸렸다. 졸고 있던 사람들도 조별로 배치받은 자기 위치를 찾아갔다. 항쟁 지도부였던 윤상원, 김영철, 이양현은 마지막으로 헤어지기 직전 서로 손을 맞잡으며 "이제 우리 저승에서나 만납시다" 하는 인사를 던지고 각자의 위치로 돌아갔다.   (237쪽)

이날 아침 광주에 진입한 계엄군이 수도군단 상황실로 타전한 <광주 상황 보고서>에 의하면 계엄군의 시간별 진입 내용이 상세하게 나타나 있다.
1980년 5월 27일
03:30 - 작전 개시 ...
04:11 - 도청에 3공수 투입
04:30 - 광주공원 7공수 투입
04:40 - 관광호텔 전일빌딩 11공수 투입
04:53 - 도청에서 61연대 지원 하에 폭도들과 치열한 교전
04:55 - 도청 완전 점령   (238쪽)
(<4. 마지막 그리고 새로운 시작> '비상! 비상!'에서)

계엄군 측에 의해 도청 진압작전이 시작되고 도청 내의 시민군들에게는 비상이 걸리고, 항쟁지도부들은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저승에서나 만납시다"라는 말을 건네는 그들의 심정은 어땠을까요. 그리고 작전 개시 불과 두시간 여만에 도청은 계엄군에게 점령당합니다.



6. 학살을 자행하고 남침을 걱정하나?

유신 잔재기구인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회의를 통해 합법적으로 대통령직을 승계한 전두환 대통령은 (1980년) 9월 16일 <워싱턴 포스트>지의 칼럼니스트 노바크와의 회견에서 "만일 광주사태 같은 일이 두 개의 다른 도시로 확대되었더라면 김일성은 10만 침략군을 내려 보냈을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광주에서의 대학살을 냉전적 안보논리 속에서 정당화했고 정규군 투입은 필연적이었다는 논리를 폈다.
(249쪽, <4. 마지막 그리고 새로운 시작> '살아남은 사람들'에서)

자국내 어떤 도시에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학살을 자행한 후, 그 학살자(들)는 대통령이 되어 외부로부터의 침입을 염려합니다. 학살을 하면 당하는 거지, 왜 저항하느냐? 라는 말로 밖에 들리지 않습니다. 비유하자면, 가족을 이유없이 폭행하면서, 대드는 식구들에게 "다른 집에서 듣겠다"라고 윽박지르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요. 그런 자가 대통령이 되었고, 그의 동기생이 또 대통령을 해먹었고, 그들이 속했던 정당 그리고 그 후예들은 아직도 대한민국을 쥐고 흔듭니다.
 
 

광주항쟁과 시민군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노래가 있습니다.
대한민국의 전직 대통령도 좋아했던 노래, 그래서 자신의 홈페이지('사람 사는 세상')까지 노랫말의 첫 부분으로 이름 붙였던 그 노래가 떠오릅니다.

 

사람 사는 세상이 돌아와 / 너와 나의 어깨동무 자유로울 때
우리의 다리 저절로 덩실 / 해방의 거리로 달려 가누나
아아 우리의 승리 / 죽어간 동지의 뜨거운 눈물
아아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 두려움 없이 싸워 나가리
어머님 해맑은 웃음의 그 날 위해
(노무현, 「여보, 나 좀 도와줘」, 225-226쪽에서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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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1119 목 16:40 ... 16:50  사진, 서두
2009 1120 금 10:40 ... 11:20  인용문
  2009 1121 토 10:50 ... 11:30  비프리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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