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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인공노할 범죄. 하늘과 사람이 함께 분노할 악행.
성폭행하고, 죽이고, 토막내고, ... 악마의 소행이라고 밖에 생각되지 않는 짓들.
이런 뉴스에, 저 역시 피가 거꾸로 솟습니다. 어느 누구와 다르지 않게, 똑같이 분노합니다.
마음 속 저 깊은 곳에서 '죽여 마땅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저는, 그럼에도, 제도로서의 사형, 사형제도에는 반대합니다.  
다른 법정에서 사형제도로 애꿎게 죽어갈 누군가를 살려두기 위해 그렇습니다.
판결에 개입할 '판사에 의한 인간으로서의 실수'와 '권력에 의한 정치적 악용'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나는 사형제도에 반대한다 - 판결의 실수와 권력의 악용 가능성

사형제도에 관한 고민을 담은 Dead Man Walking(1996).
팀 로빈스 감독 & 숀 펜, 수잔 서랜든 출연.
( 이미지 출처 - 구글 이미지 검색 )


사형 판결에 개입하는 인간으로서의 실수 가능성

죄를 범한 사람이 자신의 죄를 순순히 인정하는 경우는 드뭅니다. 법정에서 유무죄를 다투게 됩니다. 또한, 애꿎은 사람에게 범죄 사실을 추궁하는 경우도 없지 않습니다. 그런 경우, 미치지 않고서야 자신의 유죄를 인정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역시, 법정에서 죄의 유무를 가리게 됩니다. 이렇게 유무죄를 다투는 과정에는 필연적으로 인간의 실수가 개입합니다.

피고인들 중에는 죄를 범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뒤섞여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수사도, 고발도, 실수를 저지르는 사람이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무오류의 존재가 아니지요. 판사도 예외는 아닙니다. 그리고 유죄 판결을 받은 죄인들 중에는 무죄의 억울한 사람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판결도 실수를 저지르는 사람이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무오류의 존재가 아닙니다. 판사도 여기서 예외일 수는 없습니다.


삼심제도라고 해서 '실수' 가능성에서 자유로울까

삼심제도에 의한 보완을 이야기합니다. 그런 반론이 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 경우, 저는 이렇게 묻고 싶어집니다. 인류의 사법 역사상, 삼심제도가 확립된 후로, 과연 판결에 인간으로서의 실수가 개입되어 사형을 최종 선고한 사례는 단 한 차례도 없었을까. 사형 선고가 오판인 경우, 사형 집행으로 죽은 사람은 돌아오지 못합니다. 사형을 집행한 후면 늦습니다. 어떤 생명도 되살릴 수 있는 생명은 없습니다. 누군가의 실수로 누군가가 죽는다는 가정은 정말이지 끔찍합니다.


정치권력에 의한 사형제도의 악용 가능성

다른 한편으로, 그 나라의 인권 수준이 열악하거나 그 사회의 민주주의가 후진적일 때에는, 정치권력을 장악한 자들이 정치적 반대자들을, 법의 힘을 빌어 살해하는 일도 있습니다. 인류 역사상 이런 일은 비일비재하다 할만큼 적지 않으며, 슬프게도 이것은 대한민국의 삼사십년전 현실이기도 합니다. 지시를 내린 자나, 수사와 재판을 담당하는 자나, 모두 '사람'이었습니다. 실수가 아닌 악의가 개입하여 사람을 '합법적으로 살해'한 경우입니다. 죽은 사람은 돌아오지 못합니다. 어떤 생명도 되살릴 수는 없습니다. 누군가의 악의로 누군가를 죽인다는 상상은 정말이지 끔찍합니다.


실수든 악의든, 죽은 사람은 되살릴 수 없다

고교 화학 시간에 배우는 현상으로 '가역반응'과 '비가역반응'이란 게 있습니다. 저는 이걸 그냥 편하게, '되돌릴 수 있는 반응'과 '되돌릴 수 없는 반응'으로 해석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사람이 죽는다는 것, 사람을 죽인다는 것은, 예외없이 '비가역반응'에 해당합니다. 죽은 사람은 되살릴 수 없습니다.

사형은 비가역반응으로서의 '죽음'을 강제하는 일입니다. 법적이라고는 하지만, 인간의 판단이 개입되어 사형에 처해짐은 위에 적은 바와 같습니다. 사형제도의 치명적 약점은, 누군가에게 실수 또는 악의로 인해 사형을 내릴 수 있다는 점입니다. 실수든 악의든, 이미 죽인 사람을 되살릴 수는 없습니다. 제가 사형제도에 반대하는 이유입니다. 


무기징역의 기회비용 문제

간혹 듣는 이야기로, "저런 것들을 세금으로 먹여주고 입혀주고 해야돼? 죽을 때까지?"라는 반론도 있습니다. 저 역시 그렇게 쓰여지는 세금이 아깝습니다. 사회 주변부에서 복지 혜택을 입지 못해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서 허덕이는 우리의 이웃들을 생각하면 그렇습니다. 하지만 세금이 아깝다는 이유로, 감옥에서 생명을 부지하고 있는 사람을, 죽이자는 데에는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죄없는 누군가가 같은 이유로 사형에 처해질 가능성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죄인도 자백을 했고, 판결도 최고심급에서 사형이 선고되었다 하더라도, 앞서 말한 애꿎은 다른 누군가가 제도적으로 무고하게 살해되는 일을 피하기 위해서는 명백한 죄인이라도 살려둘 수 밖에 없지 않을까요. 무기징역의 기회비용으로 세금을 말하다면, 저는 그 기회비용으로 애꿎은 누군가의 생명을 들고 싶습니다.





죽여 마땅하다는 생각이 드는 악행은 끊이지 않고 일어납니다. 저 역시 그 공분을 똑같이 느낍니다. 그런데, 누군가를 사법제도로써 죽인다고 할 때, 죄없는 사람이 죽을 수도 있다면? 그 죄없는 사람의 전 존재는 세상에서 사라진 후가 됩니다. 죽이지 말았어야 할 사람을 죽였다면 이미 그때는 늦습니다.

천인공노할 범죄에 대해서는 천번만번 사형이 떠오르지만, '제도로서의 사형'에는 반대하는 이유입니다. 백보 양보해서, 누군가를 죽여야만 한다고 치더라도, 그래서 그에게 사형을 언도하는 것이 천번만번 옳다 하더라도, 그와는 별개로, 다른 법정에서 어떤 판사의 오판으로 또는 정치권력의 악의로 인해 사형에 처해질 누군가를 생각할 때 사형제도에 찬성하기 어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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