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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발적인 제목에 끌려 구입했던 책이고 나름 기대를 걸고 읽은 책입니다.

   김동훈, 「한국의 학벌, 또 하나의 카스트인가」 (책세상, 2001).   * 본문만 ~159쪽.

도서 구입은  새 밀레니엄이 열린 지 얼마 안 되어 했으나 읽는 것은 얇은 두께에 비해 지지부진(?)했습니다. 지금 살고 있는 새 집에 입주한 이듬해(2007년) 가을인가에 화장실에서 책읽기로^^ 읽기 시작했으나, 제 나름의 비법을 동원한 쾌변현상(!)^^으로  화장실에서 읽는 것이 흐지부지되었더랬습니다. 크흣. 화장실에서 읽기에는 이 책이 속도가 잘 나지 않는 것도 작용을 했던 거 같구요. ^^;;;

올해 초에 시작된 대중교통 출퇴근 독서^^를 하면서, 이 책 기억이 나서 읽기를 마무리 짓게 되었습니다. 이래저래 대중교통 출퇴근은 저에게 참 효자같은^^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
요즘 "어떤 책이든 다 덤벼! 나에겐 대중교통 출퇴근이 있으니까."라는 생각을 합니다. ^^  하루에 50~100쪽 정도의 변폭 속에서 날짜수만 곱하면 그 책은 끝나게 되어 있어...! 이러면서요. 큭.



         그래, 「한국의 학벌, 또 하나의 카스트인가」(김동훈, 2001)


지금 서평을 쓰는 김동훈의 책과, 서평이 밀린 몇권의 책들.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커집니다. )

 

1. 학벌사회의 수혜자들과 옹호자들

학벌사회에 대한 비판은 필연적으로 현재의 기득권층에 대한 공격적 요소를 갖고 있으므로 학벌사회의 수혜자들은 이를 옹호하기 위한 직-간접적인 논리를 펼친다. 심지어는 콤플렉스가 있는 자의 한풀이라거나 패자의 심리적 보상행위라는 등 감정적 폭언도 서슴지 않는다. 자신의 분야에서 날카로운 비판을 하고 있는 지성들조차 학벌문제는 침묵하거나 상식적으로납득하기 어려운 노리를 전개하기도 한다.
(35쪽, 제2장 '학벌사회 옹호론과 그 비판'에서)

한국에서 학벌문제를 건드리면 먼저 '너, 콤플렉스 있냐'라는 식의 접근을 해오지요. 딴나라당의 새우젓같은 짓을 건드리면 '너, 전라도지?'하는 식으로 딴지 거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학벌이라는 것도 하나의 기득권이라고 본다면 그 기득권을 누리는 자들의 심사는 곱지 않겠지요. 사회가 곪아터지든 썩어문드러지든 본인과는 무관하다고 생각할테니까요.
문제는 김동훈의 지적처럼 학벌에 대해서 비판을 해야할 '지성'들조차 입다물고 있는 것을 보면, 그들도 어쩌면 학벌사회의 수혜자가 아닐까 합니다. 그 유리한 '신분'을 털끝만큼도 건드리기 싫은 것이겠지요.

 
 

 
2. 대학서열화, 신분사회의 토대이자 척도

... 대학서열화는 변형된 신분사회로서의 학벌사회가 구축되는 데 결정적 기반이 되고 있다. 신분 사회에서는 신분의 결정기준이 매우 획일적이고 고정적일 것을 요구한다. ... '수퍼 명문' 서울대는 성골이요, 그 밑의 연-고대는 진골이요, 그 밑 상위권 대학들은 육두품이니 하는 이야기가 성립하는 것 ...
(90쪽, 제4장 '학벌사회와 대학서열화'에서)

신분사회는, 속성상 뒤집힐 수 없다는 것을 토대로 삼고 있지요. 그래서 김동훈은 자티(jati)라는 불가촉천민계급으로 더욱 문제가 되고 있는 인도의 신분제 '카스트'를 제목에 동원한 것일 것이고요. "한국사회의 대학서열화가 인도의 카스트 같은 신분제와 다른 것이 무엇이냐?"라는 질문을 한다면, 크게 다른 점을 찾기 힘든 것이 대한민국 학벌사회의 슬픈 현실 입니다. 서울대는 성골, 연고대는 진골, ... 으으. 이거 너무 실감나는 표현입니다.
 
 

 
3. 전국적인 단위의 비교는 선(善)인가 독(毒)인가

근본적인 문제는 학력에 관해 전국적 단위는 물론이고 지역 단위 등 학교 단위를 넘어서는 비교지표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학교 단위 내에서의 경쟁체제는 일정한 학습동기를 부여한다는 측면에서 적절히 활용할 수 있다.
(117쪽, 제5장 '대학 입학 제도의 개혁'에서)

'일제고사'라는 일제시대(!)를 연상시키는 전국 단위의 학업성취도평가가 연상되었습니다. 이제 대한민국 사회는 아니, 2mb 정부의 교육정책은 대학서열화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서 '고교서열화' '중학교서열화' '초등학교서열화'까지 하려고 하는 판이지요. '경쟁'이라는 미명하에 가르치고 배우는 교육현장을 전쟁터 정도가 아닌 생지옥으로 만들고 있는 것이라 봅니다.

저는 경쟁은 피할 수 없지만 경쟁 지향적인 교육이 과연 옳으냐 하는 데에는 의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누가 무언가를 잘한다고 하는 것. 그게 과연 경쟁을 통해 이뤄지는 것이었던가. 하는 생각도 있고요. 베토벤이 음악을 잘하고, 이순신이 거북선을 만들고, ... 했던 것이 과연 경쟁을 통해서였던가 하는 의문을 가지고 있습니다. 너무 어린 애들 줄 세워서 다들 분발하게 만들면 좋겠지만 누군가는 기죽고 누군가는 포기하는 일이 발생합니다. 다 보듬고 챙겨야할 우리들의 자식인데 말이죠. 초중등학교 일제고사를 보며 이건 좀 아니다 라는 생각하게 됩니다.

김동훈의 이야기처럼 교육현장에는 대학이든 고교든 ... 뭐든 전국적 단위의 비교지표가 동원되지 않는 것이 맞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4. 약간은 공허하게 느껴지는, 책 말미의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 당위론

학벌사회의 극복을 위해서는 그 핵심에 있는 대학 자체도 혁신적으로 변화되어야 한다.
(133쪽, 제6장 '대학의 제도적 혁신'에서)

학벌차별을 인종차별이나 성차별과 같은 차원에서 접근하여 차별금지법이나 쿼터제 등의 보호장치를 제도적으로 마련해야 한다.
(147쪽, 제7장 '의식개혁을 위한 7가지 요구 사항'에서)

... 학벌 관념을 타파하려는 의식개혁운동과 학벌 관념을 타파하려는 의식개혁운동과 학벌 관념을 생산하고 방조하는 세력과의 싸움을 ...
(151-152쪽, 제7장 '의식개혁을 위한 7가지 요구 사항'에서)


옳은 이야기지만 공허하게 느껴지는 그런 이야기들이 있지요. "그래, 다 좋은데, 어떻게 그걸 할 건데?" 하는 반발심이 들게 하는 그런 이야기들요. 김동훈은 이 책의 말미 제6장과 제7장에서 그런 이야기들과 주장들을 늘어놓습니다. 저에게는 그런 느낌이었습니다. 한편으론 대한민국 사회에서 학벌문제, 대학서열화문제가 '고양이 목에 방울달기' 같은 측면이 없지 않습니다만, 방법론이 없는 당위론의 반복은 독자를 허탈하게 하는 면이 없지 않습니다. 차라리 학벌문제와 대학서열화를 둘러싼, 처절한 현실 폭로가 더 낫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대목이기도 하고요.



그래서 총평은?

내심, 강준만의 역작(!)「서울대의 나라」(개마고원, 1996년)에서 접한 것과 비스무레한 놀람과 공감을 기대하며 집어든 책이었으나 거기에는 많이 못 미친 책이었습니다. 한국 축구도 아닌 것이, 뒷심 부족, 골 결정력 부족을 연상케 하는, '결정적인 그 무엇'을 건드리지 못하고 뱅뱅 돌기만 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읽는 저로서는 허전함을 느끼게 한 면도 없지 않습니다. 아. 이 지적은 책의 후반부가 그렇더라는 것으로 후퇴할 수도 있겠습니다. 책의 약 2/3 지점 정도까지는 그래도 김동훈이 선전(善戰)했다고 볼 수 있으니까요. 물론, 학벌사회를 고착화시키는 주장을 은밀히 또는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텍스트들에 비하면, 이 책은 가히 성서에 가깝다 할 수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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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0420 월 10:00 ... 11:20  비프리박


p.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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