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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는 자신의 죗값에 대해 용서를 빌 때 가능합니다. 씻을 수 없는 죄악을 저지르고서도 뻔뻔스럽게 고개 쳐들고 살아가는 자에게 용서란 말은 사치스럽습니다. 5.18로 그 언제 용서를 빈 적이 있다고 누구를 용서할까요. 용서란 게 약자의 자기위안으로 전락한 게 아니라면, 용서는 죄 지은 자가 자신의 죄에 대해서 뉘우치고 용서를 빌 때에라야 가능할 겁니다. 


공선옥 외 7인, 꽃잎처럼:5월광주 대표소설집, 도서출판 풀빛, 1995.
   * 본문 380쪽. 총 398쪽.

1980년 5월 광주에서 있은 악몽과 같은 시기가 소설로는 어떻게 형상화되고 있을까. <꽃잎처럼>은 그런 생각을 하면서 펼쳐 든 '5월광주' 단편소설집입니다. 공선옥, 이순원은 이 책을 구입하던 당시만 해도 젊은 작가 소리를 들었는데, 지금은 어느새 대한민국의 중견작가가 되어 있군요.

이 책은, 영화 <꽃잎>으로 잘 알려진, 최윤의 소설 「저기 소리없이 한 점 꽃잎이 지고」가 들어있는 단편소설집이자, "꽃잎처럼 금남로에 뿌려진 너의 붉은 넋"으로 시작하는 노래가사를 떠올리게 되는 제목 「꽃잎처럼」을 달고 있는 5월광주 단편소설집입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 사실적으로 재현한 소설에 떨다. 꽃잎처럼.


1980년 5월 광주. 정의를 저버린 공권력은 폭력이다.



1. 사실적으로 묘사된, 소설 속 '5월 광주'

5월 18일, 그날도 (인쇄소 식자공) 장인하는 지하실 작업장에서 글자 맞추기에 골몰하고 있었다. 오후 4시경, 그는 구부렸던 허리를 폈다. 이 시간이면 그는 늘상 가벼운 산책을 했다. ... 장인하는 지하실 계단을 올라와 뒷문으로 통하는 복도로 느릿느릿 걷는다. ... 그러나 5월 18일 그날은 달랐다. 그가 막 뒷문을 여는데 거친 숨소리와 요란한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그는 눈을 크게 떴다. 세 남자가 막다른 길의 담벼락에서 파랗게 질려 있었고, 그들을 향해 곤봉과 총을 움켜쥔 두 군인이 달려들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달려든 군인들은 총의 개머리판과 곤봉으로 남자들을 무자비하게 구타했다. 비명과 함께 붉은 핏물이 튀어 올랐다. 장인하는 자신도 알 수 없는 소리를 질렀고, 두 군인은 몸을 돌렸다.
(71쪽, 정찬, <완전한 영혼>에서)

어쩌면 이 책에 작품을 실은 소설가들은 나름의 취재를 하지 않았을까. 때로는 눈물로 얼룩지고 때로는 신음으로 얼룩진 취재를 하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제가 읽은 5월 광주 관련 사실을 기록한 몇몇 책의 기록들과 너무나도 잘 맞아떨어지고 어우러지니까요. 현실은 소설 속으로 젖어들고 소설의 한 장면은 그것이 바로 현실이 되기도 합니다. 소설적 허구와 역사적 사실이 하나가 되는 지점입니다. 역사적 사실의 소설적 형상화! 이 책이 가진 강력한 장점이자 유인동기가 아닐까 합니다. (물론, 그렇지 못한 몇몇 소설도 있긴 합니다만. ^^;)



2. 5월 18일 광주는 어땠을까. 그날의 밤하늘은, 바람은, 별은, ...

순분은 복도를 걸어 나가다가 김두칠을 만났다. 그는 엉겁결에 순분의 손을 꽉 쥐었다. 순분의 눈물이 김두칠의 손등에 떨어졌다. 김두칠은 손을 놓고 그녀의 등을 밀었다. ...
창문으로 5월의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시가지는 깊은 정적에 싸여 있었다. 하늘과 땅이 검은 장막을 하나로 휘두른 것같이 분간이 없었다. 별똥별 하나가 포물선을 그리며 사라졌다. 바람이 세차게 불어왔다. 그들은 가로수가 서걱이는 것 같은 소리를 들었다. 풀 향기 같은 냄새도 맡은 것 같았다. 김두칠은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이렇게 좋은 세상인데‥‥"
(272쪽, 홍희담, <깃발>에서)

그날 광주에서도 별똥별은 포물선을 그렸을테고, 그날 광주에서도 바람은 불어왔을테고, 그날 광주에서도 가로수가 서걱였을테죠. 김두칠의 말을 빌어, 그렇게 좋은 세상인데, 어떤 자들은 공수부대원을 투입하고, 무고한 사람을 죽이고 다치게 하고 ... 하늘과 땅이 울게 만들었던 것이죠. 홍희담의 단편 뿐만 아니라 이 책에 실린 소설들에서 저는 5월 그날을 읽었습니다. '악마'들이 생지옥으로 만들지만 않았으면 그날은 얼마나 온화하고 평온한 5월의 하루였을까. 홍희담의 소설에서 5월의 그날은 일상성을 획득합니다. 그래서 '5월 광주'는 더더욱 슬프게 다가옵니다. 역설적으로.



 
3. 누군들 5.18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그만 얘기하고 그만 덮어두고 그만 울고 그만 그만하고 싶어도 할 수 없어. 역사란 그런 거야. 갑오년이 따로 없고 기미년이 따로 없다구. 그러드키 오일팔이 따로 있는 게 아냐. 기미년의 삼일운동은 임신년에도 삼일운동으로 이어지듯이 경신년의 오일팔은 계유년의 오일팔로 새로 시작되는 거라구. ... 역사 앞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는 거거든. 그런 거거든."
현순씨는 계속계속 거거든, 거거든 하고 말했다.
(37쪽, 공선옥, <목마른 계절>에서)

공선옥의 단편에서 현순씨의 입을 통해 말해지는 "역사 앞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다"는 말은 이땅에 발 붙이고 숨쉬며 살아가고 있는 어느 누구에게도 예외는 아니리라 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의 삶이 5월 광주에서의 항쟁과 보이게 보이지 않게 얽혀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학살의 원흉들은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며, 학살에 침묵으로 일관했던 이들 또한 다른 의미로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5월 광주에 대해서 알지 못하고 사는 사람도 '알아야 할 책임'에서 자유롭진 않겠죠. 이같은 '구속'은 사실, 직접적인 피해자들이 안고 사는 '상처'에 비하면 천배 만배 가벼울 거란 생각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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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0518 화 06:25 ... 07:05  비프리박
광주 오일팔 삼십주년 오늘 대한민국은
새벽부터 전국에 걸쳐 비가 오고 있다


p.s.1
2009년 6월 22일(월)부터 25일(목)까지 4일간 읽었습니다. '5월 광주'에 관해 (다시) 읽기로 작정하고 시도했던 3번째 책이었습니다. 그런 시도로 앞서 읽은 책은 ▩ 광주여 말하라:광주민중항쟁 증언록 ▩과 ▩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였죠. 2009년의 시도는, 본의 아니게, 이렇게 세 권으로 일단락되었습니다. 이어서 '5월 광주'에 관해 계속 읽는 것은 어떤 형태로든 다시 시작하게 될테죠.

이 포스트는, 앞서 적은 바 있는 http://befreepark.tistory.com/896 글의 재구성 & 재발행 포스트입니다. 혹시 본 거 같다는 느낌이 있는 분이시라면 그 느낌이 맞는 겁니다. ^^ 5.18 광주민중항쟁 30주년에 맞춰 뭔가를 하고 싶었다죠. 

p.s.2
소설집 <꽃잎처럼>에는, 우리 소설에 관심이 있는 분이라면 알만한 작가들이 5월 광주를 문학적으로 형상화한 단편소설 총 8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기억에 남거나 인상적인 소설로 구성된 단편집니다.
   1. (공선옥)  목마른 계절 (1993)
   2. (정찬)     완전한 영혼 (1992)
   3. (이순원)  얼굴 (1990)
   4. (최윤)     저기 소리없이 한 점 꽃잎이 지고 (1988)
   5. (홍희담)  깃발 (1988)
   6. (정도상)  십오방 이야기 (1987)
   7. (윤정모)  밤길 (1985)
   8. (임철우)  봄날 (1984)
   [작품 해설] (신승엽) 광주, 우리 문학의 `양심'의 마지막 보루
1995년 출간된 이 책은, 아마도 1980년 이후부터 그때까지 나온 '광주' 관련 단편소설들 가운데 좋은 평가를 받은 것들을 골라 수록한 듯 합니다. '광주'에 관한 인상적인 소설들이 담겨 있는 이 소설집은, 애석하게도, 현재 알라딘에서 절판으로 확인됩니다.

p.s.3
그날의 광주를 기억하는 독일인 기자의 인터뷰.
- http://media.daum.net/society/others/view.html?cateid=1067&newsid=20100518192020973&p=hani&RIGHT_COMM=R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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